A Warrior’s Journey 01 – Bruc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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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팝 다큐클럽http://club.ipop.co.kr/documentary 무술의 대가, 브루스 리를 보고 계십니다 170센티미터의 키에 몸무게 61킬로의
무도의 달인 1973년 2월 홍콩은
천년 넘게 지켜온 전통과 문화를 뒤흔드는 현대화의 물결로 섬 전체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 당시 홍콩에서
가장 큰 뉴스는 영화산업의 급속한
성장이었다 홍콩 극장주들에게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홍콩의 영화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영화사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런 갑작스런 관심의
배경에는 32살의 브루스 리의
명성이 있었다 브루스 리의 역동적인
모습과 전 세계 관객들의 호응으로 엄청난 흥행성적을
올리게 된다 제작자들이 영화계의
미래를 보장해줄 ‘중국 영화계의 신성’ 브루스 리를 보기 위해
몰려와서 일년 전만 해도 ‘브루스 리 특급 대우받다’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제안을 쏟아놓게 된다 문화적, 직업적인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과 더불어
자신의 일을 인정받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브루스 리는 세계에서 가장
귀하신 몸이 된 것이다 그런 막강한 영향력으로 브루스 리는 매일같이
밀려드는 제안에 만족하면서 안전한 길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구태의연한 제안은 이 젊은이에겐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대신, 브루스 리는
사망유희 를 촬영하며 최초로 무술에 대한
그의 개인적 철학을 담아내며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브루스 리는 짧은 공백 후
이 영화로 돌아오는데 그 전해 가을에
마지막 세 장면을 촬영했음이 밝혀진다 브루스 리는 이 영화 제작에서 여덟 명의 몫을 해낸다 감독, 제작,
무술지도, 각본에 세트 디자인, 촬영과
영화의 조명에까지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물론 주연까지 카메라에 익숙치않은
무술인들은 적당히 극적인 효과를 위해
카메라에 반응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는데 그것도 브루스 리의 일이었다 정확한 무술 동작 지도를 하였고 브루스 리는 어떤 때는
4일이나 소비하여 5분 분량의 결투장면을
찍기도 했다 브루스 리는 본인에게도
엄격하여 원래 쌀도리깨였던 동양의 고대 무기,
쌍절곤을 다루는 장면에서 브루스 리는 화면에
3.5초 등장하는 것도 최소한 열 번은
촬영을 하였는데 자신의 영화에 현실감이
있길 원했기 때문이다 사망유희 촬영은 워너사가
브루스 리의 다음 작품의 공동 제작에 관심을 보인
1972년 10월 중단되는데 이는 동서양
영화사상 최초로 중국과 미국이 합작을 한
대사건이 된다 브루스 리는
이 공동제작을 중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중국 영화를 국제 시장에
알릴 기회로 생각한다 본인의 첫 영화 전에
중국 영화를 많이 봤습니까? 브루스 리의 목소리 채록
‘1971 년’ 어떻게 보셨습니까? 질적인 면에선 기준이하란 걸
나도 인정합니다만 점점 더 성장하고 있으며 질적인 면에서
기준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브루스 리와, 동업자인
레이몬드 초우는 1972년 11월
로스 엔젤레스로 날아가 워너 브라더스사와
협상을 매듭짓고 그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작품
용쟁호투를 제작한다 1973년 1월에서 4월까지
브루스 리는 용쟁호투에 전념하고 역시 모든 제작과
제작후 과정에 참여한다 스케줄이 허락하는한 사망유희의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다가 1973년 7월 중순
생을 마감하게 된다 7월 20일, 생의 마지막날을
각본에 대해 의논하며 보내고 이 운명의 날, 브루스 리는
낙관적인 심정으로 73년 9월 20일을 바라본다 이 날 일기에 사망유희의 촬영을 재개하겠단
심정을 토로해 놓았다 이 것이 그가 쓴
마지막 말이었다 ‘편히 잠드소서’ 브루스 리의 죽음은 홍콩을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의혹, 충격, 분노 젊은 나이에 엄청난
업적을 이룩했으며 앞날이 창창했던
그가 사라진 것이다 브루스 리의 죽음과 함께
그가 개척한 리얼리즘의 움직임 또한
사라져 버렸다 즉시, 액션 영화들은
조잡하고 진부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망하기 몇 주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도 브루스 리는 자신의 영화와
삼류 영화사가 만든 영화들 사이엔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언급했다 브루스 리 영화를 보면 볼수록 관객들은 연기력뿐만
아니라 무술 능력도 확연히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망 5년후, 브루스 리가
생애 마지막 몇 달간 애써 작업한 것들이 사망유희란 영화에
삽입이 되는데 이 영화는 브루스 리의 원작관
비교도 되지 않았는데 브루스 리의 무술지도나
각본, 모티프없이 제작자들은 100분의
영화를 뭘로 채워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더욱이, 브루스 리는
완벽주의자라 영화100분 분량의 3분의 2는 브루스 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버렸던 필름 중에서 발췌하거나
재촬영을 한 것이며 자신들이 찍은 영화 중 11분 7초만 사용했으며 나머지 21분 분량은
폐기했다 실제 브루스 리가 나온 필름을
싸움 장면에 짜깁기하거나 브루스 리의 머리만
마분지로 오려넣어서 위대한 전설의 이야기를 한낱 우스개거리로 만든다 이땐 브루스 리의 열혈팬들도 원작 필름은 사라졌다고
믿기 시작하고 브루스 리가 직접
찍은 필름이나 원래의 스토리라인도
알 수 없을 거라 믿는다 1994년 가을 브루스 리가 살아생전 집필한
서적을 조사하는 도중에 사망유희의 원작과
무술 안무가 발견되었다 거기서 오랫동안
짐작해왔던 대로 브루스 리의 사망유희의
촬영은 알려진 것보다 상당량 많이 찍은 것이
판명되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무술 지침서에서 발견되는데 12쪽 분량의 직접
작성한 스토리라인으로 모든 장면과 대사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원작 스토리라인은
이미 발표된 영화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브루스 리의 대본을
발견한 후 사라진 필름을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6년이 흐른 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 35밀리 원본이 발견된 것이다 사반세기나 떨어져 지낸 후에야 브루스 리의 원래 필름과
각본이 다시 만난 것이다 이 화면에서 브루스 리가
보여주고자했던 화면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 필름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브루스 리의 고충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분은 전설 뒤에 숨겨진 브루스 리의 진정한 모습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물질이지만 단단한 화강암이라도 뚫을 수가 있으며 또한 실체가 없는데 그 말은 손으로 잡을 수도
뚫을 수도 없단 뜻이다 그러니 쿵후를
연마하는 이들도 브루스 리 스크린 테스트
‘1965년’ 물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적에게 대처해야한다 때는 1965년 2월,
캘리포니아의 로스 앤젤레스 24살의 브루스 리가
제작이 불발로 끝날 TV물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19개월 후, 브루스 리는
그린 호넷 에서 가토란 이름으로 미국
시청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5년 후 무술의 역사를 영원히 바꿀
중대한 일이 생기고 그리고 8년 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배우가 된다 그러나 그건 미래의 일 지금은 무명의 배우일 뿐이다 – 미국에서 대학 나왔소?
– 네 – 전공이 뭐요?
– 철학입니다 서양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철학에 대한
브루스 리의 관심은 그의 일생 동안
함께하는 열정이 된다 브루스 리는 미국인들에게 6년 동안 중국의
철학과 문화를… 난해한 중국 사상을
가르치지만 그러나 그의 열정은 1965년 미국엔 생소했던
중국 무술인 쿵후였다 브루스 리의 스크랩북을 통해
쿵후 지도자들의 다양한 기술과 전통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 1965년 당시 미국인들의
무술에 대한 지식은 유도나 유술이 전분데 둘 다 한국전 당시 배운
일본의 무술이었다 브루스 리는 본인을
중국 무술의 전도사로 여기고 중국 무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 당신이 가라데나
유술이 동양에서 가장 강력하고 최고의
무술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요? 최고란 말은 좀 그런데
쿵후가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쿵후에 대해 좀
얘기해 주시겠어요? 쿵후는 중국에서 기원했고 가라데와 유술의 뿌리죠 좀 더 체계가 완벽하고
더 부드러워요 제 말은 물 흐르듯이
동작이 연결된단 거죠 동작마다 딱딱
끊어지는게 아니구요 그렇군요, 그럼 쿵후와
가라데의 펀치의 차이는요? 가라데는 쇠막대기처럼
“쾅” 내리치지만 쿵후는 쇠사슬끝에
쇳덩어리가 달린 것처럼 – “쓩”하면서 안에 타격을 주죠
– 그렇군요 브루스 리는 지난 9년간
영춘권이라 불리던 중국의 쿵후를 연구한 재능있고 훌륭한 무술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브루스 리의 스승은
고령의 홍콩인으로 엽민이란 분이었다 그의 뛰어난 쿵후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적인 마음은
항상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왜 대부분의
중국 무술인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데 급급하여
무술의 궁극적인 진실을 꿰뚫어
문제를 더 깊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의문이 생겼다 더욱이, 브루스 리는 자신만의
쿵후를 개발했는데 스스로 “고전적이지 않다”고
묘사했으며, 그 핵심은 동작의 경제성, 즉
단순성과 직접성이다 좋아요, 예를 들어
책이나 잡지에서 보면 누가 당신을 잡으면 당신은 처음엔 이렇게
그 다음 이렇게… 한 동작 전에
수 천가지를 합니다 물론, 그런 잡지에서도
적을 두려워하고 동지들의 존경을 받고
하는 따위도 가르치긴 합니다 그러나 쿵후의 동작은
빨라야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당신 손을 잡으면 여러 동작을 할 게 아니라
발등을 밟으면 바로 놓겠죠 이게 바로 단순성입니다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동작을 최소화해서 모든 걸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 동작으로 끝내야죠 그것도 우아하게요 소리치고 뛰면서
법석을 떠는게 아니라요 실례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술계는
이걸 달가워하지 않는데 한낱 애송이가 수천년의
전통을 거스르고 권위에 대항하는 것은
현체제가 세워놓은 권력기반에 대한
위협이었다 브루스 리의 출현 이전엔 타키 키무라
‘브루스 리의 수제자’ 쿵후가 중국 사회에선
활발히 퍼져나갔으나 외부엔 전혀 알려지지
않았죠 브루스 리가 나타나면서 민족을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히 기회를 주는데 인종과 피부색에 상관없이
도장에 받아들였습니다 누구든 긍정적인
마음자세만 있다면 다 받아들였어요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을때 그 곳의 중국인 지역은
중국과 다름 없었는데 거기만 예외였죠 브루스 리가 뜻을 관철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오클랜드에서 린다 리 캐드웰
‘브루스 리의 미망인’ 샌프란시스코의 중국
무술인의 도전을 받아요 그리고 이 도전에서 브루스가 패한다면
백인과 비중국인에겐 무술을 가르치면
안 된단 조건이 달렸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 무술인이 오클랜드의 남편에게 찾아와
정식 도전을 했죠 저도 거기 있었는데 사실 그때 브랜든을
임신한지 8개월이었죠 제임스 리도 있었고요 중국 무술인과의 결투는
약 3분만에 끝났는데 주로 달리는 거였어요 이 중국인이 방을
빙빙 돌며 뛰어다니고 남편이 쫓아가서
마침내 잡아서는 마루에 눕히자
그 남자가 기권을 하고 그 도전은 그렇게 끝났죠 중국 무술인이
완패를 하고 깨끗이 물러났고 남편이 누구든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어요 1967년 2월엔 도장이
셋으로 불어났는데 시애틀, 오클랜드
그리고 로스 엔젤레스로 ‘브루스 리 스타일 쿵후’ 비무기 결투에 대해 거듭된 그의 연구에 바탕하여 재창조된
자신만의 쿵후를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 브루스 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비판하고 현재 미국에서 시행되는
무술의 한계도 심각하게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패턴화된 리듬을
적용하여 현재 연습으로 얻어지는
자기 방어의 형태는 현실적인 기반이 없다고
믿게 되고 실제 싸움은 연습이 아니라
갑작스레 일어나고 리듬이 불규칙하여 예상치 못한 형태로
진행된단 것이다 심지어 그 당시 가라데
선수권 대회도 접촉 없이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획득한 점수에 따라 상대방을 건드리지도 않고
이기는 방식이었다 승리도 심판들이
결정했는데 실제 싸움이었다면
어느 참가자가 상대방을 많이 다치게
했을까를 짐작하는 식이었다 브루스 리는 이런 가짜
싸움은 무용지물이라 보고 “조직화된 절망”,
“마른땅에서 수영하기”라고 불렀다 브루스 리의 비판은 홍콩에서의
경험에 바탕을 두는데 ‘브루스 리가 찍은 화면, c. 1956’ 비접촉 가라데 시합이 아닌
실제 거리에서의 싸움과 홍콩의 지붕에서의
싸움이 그런 것이다 지붕 위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쿵후 고수들과 싸우기도 했지만 브루스 리는 칼과
사슬로 무장한 적을 상대해
싸우기도 했다 그런 실질적인 경험에선
심판 따윈 필요치 않았다 차라리 브루스 리는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 비접촉 가라데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느니 비무장 결투에 대해
좀더 과학적인 접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브루스 리의 연구는
뉴턴의 물리학과 전통보다는 효율성을
규율의 표준으로 보는 유럽의 펜싱과 서양 복싱의
기술과 법칙에 관심을 갖게되고 그런 연구를 통해서
전투의 기술의 가치는 상대방을 효율적으로 쓰러뜨리느냐, 않느냐에
달렸단 걸 이해하게 된다 브루스 리는 장식적인 것은
모두 버리고 실제 자기 방어의 상황에서 실용적이라 여겨지는
기술만을 남겨 놓았다 브루스 리는 북미,
어쩌면 세계 최초로 제자들에게 복싱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스파링을 하게 한
최초의 무술인이다 미리 연습을 하지 않고 실제 격투를 하는 것이
매일의 과제였다 1967년에 브루스 리는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서 열린 국제 가라데 선수권 대회에서
풀 컨택 스파링을 소개한다 이 새로운 스타일에선
상대방이 실제 결투에서 어떤 식으로 싸울 것인가에
대비한 방어가 중요한게 아니라 브루스 리의 새 방식은
공격에 초점을 맞추거나 좀 더 정확하게 상대방의
공격을 자신의 공격으로 재빨리 막는 것이었다 1967년 여름에 브루스 리는 자신이
새로 개발한 무술을 방해의 원칙이라고 정의내리게 된다 광동어에서 비무장 결투는
전형적으로 주먹으로 싸우는 걸 의미하는데 브루스 리는 자신의 새 무술을
주먹을 저지하는 방법이란 뜻의
절권도로 명명한다 이건 뭐라고 하죠? 광동어로 절권도라고
주먹을 저지하는 방법이죠 – 주먹을 저지해요?
– 발도 마찬가지고요 어서 아무데나 때려봐요 나한테 닿으려면
내쪽으로 움직여야죠 당신의 공격이 제게
당신을 저지할 기횔 줘요 이런 경우, 내 가장 긴 무기인
옆차기를 이용하여 가장 가까운 타겟인
당신의 슬개골을 공격하죠 이건 복싱에서 레프트잽에
비교할 수 있는데 좀 더 위험한 것 뿐이죠 그렇군요, 레프트 잽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엔 당신의 긴장된
감정을 저지했소 당신이 생각에서 주먹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죠 머지 않아, 브루스 리의
명성은 멀리 퍼져나가고 미국의 무술 고수들뿐만
아니라 남 캘리포니아의 배우와 운동선수까지
찾아드는데 그 중엔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카림 압둘-자바도 있다 카림 압둘-자바
‘브루스 리의 제자’ 사부님은 인습을 타파한 이단아였으며 전통적인
무술이 너무 전통에 얽매였다고 생각했어요 무술을 별로 잘 하지
못해도 무술 발전에 별다른 공이 없어도
무술에 대한 국가적 명성이나 세계에 대한 관점등이 실제 무술 체제보다
중요하다고 봤거든요 그러나 사부님은 무술의
정수만을 얻길 원했어요 차이나타운 중심에 위치한
브루스 리의 로스 엔젤레스 도장은 별다른 광고 없이도
무술 초보자가 아니라 검은 띠 유단자들이 브루스 리의 무술은 혁명이며
그의 재능을 특출하다고 여겨 모여들기 시작했다 워싱턴 스타의 브루스 리의 목소리 채록
‘1973년’ 스포츠위크 1970년 8월 16일
워싱턴 D.C.에서 발간 “브루스 리의 세 제자, 조 루이스,
척 노리스와 마이크 스톤이 미국 유수 가라데 선수권
대회를 휩쓸었는데 조 루이스는 3년 연속
전국 챔피언에 올랐다 브루스 리는 이 사람들을
부모가 어린 아이 대하듯 지도하고 다루는데 보기에 좀 민망할
수도 있다 옛날 서부의 술집에
들어섰을때 그 곳에서 가장 손이
빠른 자가 흠집이 잔뜩 간 총을
들고 서 있는데 유쾌하고 체구작은
사람이 들어와서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나?’ 라고 훈계를 하면 총 든 고수가 귀 기울여
듣는 것과 같은 꼴이다 미국의 유명 배우와
무술인들이 직접 집으로 가르침을
받으러 오니 브루스 리는 무술계의
유명인사가 되지만 1969년 말이 되자 브루스 리는 그의 제자들이
싸움에서 이기고 성공을 하기 위해
비법을 전수받으려고 모여든다는 사실에
우려를 나타낸다 브루스 리에겐
비법이란 없었다 성공한 무술인이 되려면
고된 훈련을 마다않고 자신의 내적 능력을
키우는 길 밖에 없다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브루스 리는 무술계에선
전례가 없는 일을 단행한다 1970년 1월 무술계에서 인기와 명성이
최절정이던 그 때 자신의 쿵후 도장
세 곳의 문을 닫는다 사범님이 도장 문을 닫았을때
제자들을 통해 자신의 방식이 뛰어난 걸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벗어
홀가분해 했어요 그런 걸 원치 않았거든요 사범님은 발전하고
가르치고 싶었지만 “내 가르침대로 가르쳐라”
“배운 대로 가르쳐라” 라는 식은 아니었어요 자신이 가르친 이상으로 제자들이 자신의 방식을
이해하길 바랐던 거죠 이걸 가르쳐주시면
되겠네요 당신을 가르칠 순 없소 스스로를 개발하도록
도와줄 뿐이오 브루스 리는 개인적으로
몇몇 제자만을 가르쳤으며 그의 무술은 스스로의
발전에 중점을 뒀으며 제자들의 기술 향상이나
신체적 또는 심리적 한계를 극복하도록 도우려면
제자들 개개인을 알아야한다고 느끼게된다 당신의 육감은? 기도하고 싶소 이 위치에서 당신의
팔은 무용지물이에요 – 네
– 날 찰 수 있겠소? 아뇨 그럼 살아남기위해
어떻게 할 겁니까? 모르겠어요 물어요 – 물어요?
– 우리도 동물이잖아요 괜찮아요? 반대되는 증거는
별로 찾기 힘들군요 물라고요? 근거리에선 무는 것도
효과적이지만 물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러다 이빨 다쳐요 기억할게 너무 많아요 기억하려고 애쓰면
다 잊을 겁니다 마음을 비워요 물처럼 형체를 없애요 컵에 물을 부으면 물은 컵이 되고 주전자에 넣으면
주전자가 되죠 물은 흐를 수도,
똑똑 떨어질 수도 있죠 물이 되세요 좋아요, 그럼 폴 앞에서
그 문장을 인용해보죠 그럼 기절하거나
익사할 걸요 언제죠? 내일이요 당신은 준비가 안 됐어요 알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도
이기는 방법만 원하지 지는 건
절대 못 받아들이죠 패배를 받아들이고 죽음을 배우면
거기서 자유로워져요 그러니 내일이 되면
야망을 모두 버리고 죽는 방법을 배우세요 나한테 이런 말을 했죠 예를 들어 내가
유도를 한다고 하면 내가 그 사람 밑에 깔려서
상대방을 힙으로 밀쳐내려고 힙을 들어올린다고 상상하죠 “내가 자네를 때려눕힐 동안
그렇게 하겠다고?” “아마 그렇게 안 될 걸” 그의 말이 옳았어요 브루스 리는 신념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줬는데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지성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극복했으며,
자신의 육체의 능력을 무한의 경지로 올려
극복해낸다 브루스 리는 매일
한 손가락 팔굽혀펴기와 오랫동안 손으로 몸을
지탱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는 상대방을
일 인치 앞에서 때려도 몇 피트까지
날릴 수 있었다 그의 옆차기를 맞아본
사람은 이렇게 묘사한다 “차에 치인 것 같았어요” 그는 인간의 몸의 한계를 알아내려는 듯
일주일에 6일 훈련했다 그러다 1970년 8월 13일 절망적인 소식을 접한다 역기를 들기 전
준비 운동을 잘못하여 허리의 네번째 천골신경을
심하게 다친다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힐 부상으로 6개월간을 침대에
누워지내게 된다 의사는 다신 찰 수
없을 거란 진단을 내린다 그에겐 24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서 6개월을 지낸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그를 그렇게 둘 순 없어요 그렇지만 해냈어요,
제대로 걷기라도 하려면 회복될 시간이 필요하단 걸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누워서 지냈으며 또 의자에 앉아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죠 그러면서도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어요 남편은 그 시간 동안 방대한 양의 책을 보며
공부에 몰두했는데 무술, 전술과 백병전에
관한 책을 동서양, 현대, 고대를
막론하고 읽었으며 모든 종류의 철학 서적과
심리학 서적 중에서 동기 유발 부분을
읽었는데 본인이 다쳐서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죠 육체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없게 되자 정신을 사용한 것이다 부처, 알런 와츠,
칼 로저스, 노자 프레드릭 펄즈, 다이세츠 스즈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그의 동무가 되어준다 이 작가들 중에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에 특히 매료되는데 “진실은 무효화하지 않고는
정리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빛이 되어야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1974년 TV 인터뷰’ 교수나 분석가의 빛이나 심리학자나 예수나 선한
양심의 빛에 의지할 게 아니라 어두워져가는 세상에서 스스로에게 빛이 돼야 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을
좋아했던 이유는 자기의존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죠 진실은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한다는 거요 브루스 리는 자신의 신념을
무술에 적용하여 저술하는데 그 양이 7권이나 되었다 천천히 회복하고 있었고 허리 부상이 평생을 갈 거라고
했지만 6개월 안에 그는 비관론자들과
의학계가 틀렸음을 증명했다 다시 차게 된 것은 물론
이전보다 더 훌륭한 무술인이 된 것이다 브루스 리의 이런 시련에
새로운 신념이 보태지는데 그 신념이란 의지할 사람은
본인밖에 없다는 그런 믿음으로 비무장 결투에도
적용이 되는 얘기였다 모든 무술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라는 자신이 창조한 절권도 조차도 그의
분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브루스 리는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무술의 권법을 가르치려 했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실수를 보았다 처음엔 중국 무술이
그렇다고 여겼고 최근엔 자신이 개발한
절권도가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브루스 리는 이제
궁극적인 진실은 권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영혼에 있단 걸
이해하게 된다 전 권법을 신봉하지 않아요 제 말은 중국식 결투라던가
일본식 결투라던가 하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인간의 팔이 세 개,
다리가 넷이 아닌 한 권법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두
팔, 다리가 두 개씩이죠 그러니까 권법은 일정한 원칙때문에
사람들을 분열시킬 뿐아니라 그런 원칙이 절대적 진리로
여겨져 바꿀 수 없으며 권법이 없이 단순히 “난 인간으로서
완벽하게 나 자신을” “표현한다”고 한다면요 두 사람이 서로의
움직임을 인식하고 한 사람이 상대방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거기에 맞춰서
대응하는 것으로 정해진 패턴의 움직임이
필요없단 얘기죠 그냥 “저 사람이 이렇게
하면 난 이렇게 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따라 자유롭게 반응하면 되니까요 사실, 남편은 이 메달 뒤에
그걸 완벽히 새겨넣어 그 말을 자신의 모토로
삼습니다 “무권법이 권법이고
무한계가 한계이다” 그러나 수년 동안
이 말이 잘못 해석되어 사람들은 “무권법이
권법”이란 말을 “내가 하는 방식은” “어떤 것이든 괜찮다”로
이해했죠 남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텐데도요 일정한 틀에 얽매여서 한가지 대응만 하게되는 그런 상황에 놓이지
말란 뜻이었죠 상황에 맞춰서
행동하란 뜻이죠 남편이 정말 훌륭히
해냈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제 경우엔 무술이란 결국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인데 이젠 어렵게 됐어요 전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잘난 체하고 스스로 그런 감정에
도취될 수도 있고 아님 별것도 아닌 걸
보여주고 아주 멋진 동작 같은 걸
보여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자신을 정직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그건 정말로 힘든 일이죠 그게 바로 열쇠죠 자신을 아는가?
자신의 기술을 아는가? 자신의 약점을 아는가?
당신의 삶에서 플러스건 마이너스건
일어나는 일 그대로에 적응할 수 있는가? 그게 그의 접근법이었고 사범님은 완벽한 모델이었어요 굉장한 호평을 받으며 출연한
TV물 롱스트리트에서 브루스 리는 제자 역을 맡은
제임스 프란시스커스에게 그의 무술의 고매한
목적을 가르치려고 한다 ‘롱스트리트, 1971 ‘ 어젯밤에 했던 거
나한테 가르쳐줘요 스패로양에게 못 한다고
이미 말했어요 당신의 차를 마시기위해
내 컵을 비울 용의가 있소 당신의 개방적인 태도는
훌륭하지만 변하는 건 없소 롱스트리트 씨, 전 권법이나
체계 같은 건 믿지 않아요 권법이나 체계가 없는데
뭘 가르친단 말이오? 당신도 배웠잖소 나면서부터 몇 초안에
셋을 쓰러뜨린 건 아니잖소 사실이오만 난 내 무지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그럼 나도 도와주시오 “무권법이 권법이요,
무한계가 한계”란 진실을 발견한 후로 브루스 리의 임무는 이 진실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일대일 개인 교습이 아니라 커다란 화면을
통해서란 걸 깨닫는데 그의 요구는 무술의
고매한 목적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의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는 것이며 할리우드의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였다 남편은 그 순간
무술을 가르치기보다 영화산업에 뛰어들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영화와 TV에서
배역을 따려고 노력하죠 “말로”, 1969 좋아요 남편은 주연을 따내는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소규모 영화에서 배역은
많이 맡았지만 주연으로서 경력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 당시 미국에선
어려운 일이었죠 미국에서 동양적인 것 진정한 동양적인 것을
보여줘야해요 – 할리우드에선 못 보여줬죠
– 물론이죠 변발한 중국인이
뛰어다니는 것만 보여주고 눈꼬리는 찢어지고
그런 것 뿐이죠 브루스 리의 각본을 쓴
사일런트 플룻은 젊은 무술인의 자기 발견
과정을 다룬 것인데 할리우드에서 참패했다 브루스 리는 그때 재정적으로
힘든 시기였어요 편지에서 저에게
차 고치는 일을 한다며 다음 달 받은 편지에서
사일런트 플룻 일이 잘 안 됐다고 했어요,
그 쪽에선 아시아계가 그런 영화에 주인공을
맡을수는 없다고 했다는군요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그는 무술 철학을 담은 텔레비전 시리즈 물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원래 전사로 이름 붙였다
쿵후로 제목을 바꿨다 쿵후 시리즈에 대한
구상을 했을 때도 쿵후 시리즈의 제작자들과
의논을 많이 했어요 제작에 착수하자
남편을 쿵후의 주연으로
고용하지 않고 대신 백인을 썼는데
그건 남편이 중국인이라 상품가치가
떨어진단 거였죠 미국 시리즈에서 중국인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애로 사항에 대해서 물어보죠 영화계쪽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을 때요 “관객들이 미국인이 아닌 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소” 그런 질문은 항상 있었죠 사실 의논도 했었고요 그래서 전사가
방영되지 않을 겁니다 – 그렇군요
– 불행히도 이 세상엔 그런 일이 존재해요 글쎄요, 미국의 어떤 지역에선 비즈니스 차원에서 모험이라
생각하겠죠, 이해해요 홍콩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외국인이 와서 스타가 되고 내가 돈줄이라해도 아마 걱정을 했을 겁니다 관객들이 받아들일까,
안 받아들일까에 대해서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스스로를 정직하게 표현한다면
문제될 게 없죠 브루스 리는 할리우드에선
잘못 알려진 전형적인 동양인 모습만을
원한단 걸 깨달았다 재정 상태가 나빴지만
중국인을 비하하는 역을 맡기를 브루스 리는
거부했다 부양할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브루스 리는 그의 존엄과 철학적
원칙이 위기에 처했다 돈이 급속히 바닥을 들어내자 그는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시간낭비를 한단 걸 깨달았다 브루스 리
‘전화 인터뷰 1972’ 전 중국인입니다,
편견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각할때 중국인이 나오는 영화가
몇 편이나 됩니까? – 맞아요
– 설사 나온다해도 전형적인 중국인의
모습으로 나오죠 – 제 말 아시겠죠?
– 그렇죠 그래서 “관두자”고 생각했죠 그런 거부감 때문에
70년도 초기의 영화 산업의 인종주의에 대한
표현을 그렇게 한 거죠 그래서 그때 홍콩으로 갔어요 남편은 미국 영화계에
정문으로 못 들어간다면 홍콩으로 갔다고 옆문으로
돌아오겠다고 생각했고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 액션 영화는
주로 칼싸움이 난무했는데 브루스 리의 표현을 빌자면 “단순한 칼싸움 난장판”이다 남편은 자신이 중국영화의
폭력을 조장한게 아니며 필요할 때만 폭력을
사용했다고 했어요 전 제가 나오는 영화엔 왜 폭력이 사용되는지
뭐가 옳고 그른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폭력을 위한 폭력이죠,
내 말 아시겠어요? 30분간 싸운다던가
50군데 찔린다던가 돌아 오셔서…
마이크 집어드리죠 – 돌아오셔서 놀랐어요
– 전 무술인입니다 첫 영화의 출연료는
아주 보잘것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돈은
중요한게 아니었다 당산대형 이란 제목으로
개봉된 이 영화는 동남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고 다음 영화, 정무문으로
전례없는 성공을 기록하며 당산대형의 기록까지
깨게 된다 남편은 자신이
중국 영화 배우나 중국 무술인으로
묶이는 걸 싫어했어요 스스로를 중국인으로만
보진 않았거든요 스스로를 임무를 가진
세계의 시민으로 봤으며 그건 국적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죠 그런 무술과 삶과
짧은 생애 동안 자신이 경험한 문화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전 세계 관객에게 전하는게
본인의 의무라 생각했죠 브루스 리는 자신이 직접 감독한
다음 작품 맹룡과강에서 이런 꿈을 시험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자신의 제자였던 척 노리스를 로마 콜로세움
격투 장면에 출연시킨다 브루스 리는 전형적인
쿵후 기술로 계속 지다가 형식이 없는 절권도를
도입하며 이기기 시작한다 “맹룡과강”, 1972 맹룡과강은 또한 브루스 리에게
자신의 인생철학을 더 깊이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영화에서 본의 아니게
적의 목숨을 뺏고 브루스 리는 동료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는 상징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것은 인종을 떠나
모두가 형제라는 자신의 철학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된다 처음 두 작품을 끝내고
자신의 창작물인 맹룡과강의 작업에
착수했어요 그리고 물론 사망유희와
용쟁호투가 뒤를 잇죠 그리고 보다시피
영화가 점점 진행될수록 결투에 더욱더 정당한
이유를 붙이고 먼저 왜 결투가 일어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무술 아래 놓인 철학을
표현하고 있죠 “용쟁호투”, 1973 신경 쓰이나? 괜히 힘빼지 마 – 자넨 어떤 권법이지?
– 내 권법? 싸우지 않고 이기는 권법이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권법”? – 구경 좀 해볼까?
– 나중에 좋아 여긴 좀 비좁잖아? 그럼 어디? 저 섬의 해변에서,
이 보트를 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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